한양도성의 한 축을 이루는 명산
글과 사진 / 송일봉(여행작가)
한양도성을 이루는 내사산(內四山) 가운데 하나인 인왕산(해발 338.2m)은 자연미가 매우 뛰어난 산이다. 하지만 바위가 많고, 가파른 구간이 많아서 등산을 하기에 그리 만만한 산은 아니다. 그래서 서울시 종로구에서는 인왕산 중턱의 경치 좋은 구간에 ‘인왕산 숲길’을 조성해놓았다. 2.5km의 이 구간에는 수성동, 해맞이동산, 청운공원, 시인의 언덕 등이 있다. 참고로 한양도성의 동쪽에는 낙산, 남쪽에는 남산, 북쪽에는 북악산이 있다. 한양도성은 예전에 ‘서울성곽’이라 불리기도 했는데 지난 2011년부터는 ‘한양도성’이라 부르고 있다.
수성동계곡의 기린교
. 호랑이를 소개하는 안내판
*얘깃거리 많은 산책로, ‘인왕산 숲길’
‘인왕산 숲길’ 곳곳에는 잠시 쉬어갈 수 있는 공간과 전망대들이 잘 마련되어 있다. 그리고 이들 쉼터에는 인왕산과 관련된 인물이나 그림들을 소개하는 안내판들이 있어서 더욱 좋다.
인왕산에는 예전에 ‘옥류동’과 ‘수성동’이라고 불리는 아름다운 계곡이 있었다. 이 두 계곡의 물줄기는 기린교에서 만나 청계천으로 흘렀다. 하지만 지금 옥류동은 주택가로 변했고, 수성동은 아파트를 허물고 어렵게 복원했다. 참고로 여기에서 말하는 ‘동’은 ‘골짜기’ 또는 ‘계곡’을 가리킨다.
인왕산 자락은 조선 시대 후기에 문예활동의 중심지로 유명했다. 경치가 좋은 옥류동 일대에서 중인계층의 문인들이 수시로 시회를 열었기 때문이다. 당시 인왕산을 대표하는 시회는 중인이었던 천수경(1758~1818년)이 주도하던 ‘송석원시사’였다. 천수경은 인왕산 옥류동에 있는 자신의 집에 ‘송석원’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수시로 시회를 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쉽게도 인왕산에서 ‘송석원’을 찾을 수 없다. 그 자리에 주택가가 들어서 있기 때문이다. 단지 단원 김홍도가 그린 ‘송석원시사야연도’에서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단원 김홍도는 이 그림을 1791년에 그렸다. 송석원과는 달리 수성동(수성동 계곡)은 옛 모습대로 잘 복원되어 있다. 수성동의 명물인 ‘기린교’ 역시 제 자리에 복원했다.
‘인왕산 숲길’의 북쪽 끄트머리에는 청운공원이 있다. 청운공원은 윤동주 시인이 옥인동에서 하숙을 하던 시절에 자주 왔던 곳이다, 현재 청운공원 안에는 ‘윤동주 시인의 언덕’이 있는데, 이곳에는 윤동주 시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서시’를 새긴 시비가 세워져 있다.
. 인왕산 치마바위
*인왕산 치마바위의 전설
바위산인 인왕산에는 이름난 바위들이 참 많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치마바위, 선바위, 범바위, 기차바위 등을 들 수 있다. 이 가운데 가장 유명한 바위가 치마바위인데, 이 치마바위에는 너무나도 가슴 아픈 사연이 담겨 있다.
때는 조선 10대 임금인 연산군이 재위하던 1506년. 당시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 등이 주도한 반란세력은 연산군의 왕위를 빼앗았다. 그리고는 연산군의 이복동생인 진성대군을 왕으로 추대했다. 그가 바로 조선 11대 임금인 중종이다. 이 사건을 가리켜서 ‘중종반정’이라고 부른다.
중종반정으로 준비 없이 왕이 된 중종은 걱정이 많았다. 그 걱정거리 가운데 하나는 왕후의 거취와 관련된 것이었다. 중종반정에 협조하지 않은 좌의정 신수근이 중종의 왕후인 단경왕후의 아버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종은 왕비를 궁궐 밖으로 내보낼 수밖에 없었다. 반란을 일으킨 무리들의 주장이 워낙 강했기 때문이다.
궁궐에서 쫒겨난 단경왕후는 인왕산 자락에 있던 친정에 머물렀다. 그리고 매일 인왕산 병풍바위로 올라가서 붉은색 치마를 펼쳐놓았다. 궁궐에 있는 임금에게 자신의 안부를 전했던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중종도 수시로 경복궁 경회루에서 붉은색 치마가 펼쳐진 병풍바위를 보며 눈시울을 적시곤 했다. 하지만 중종과 단경왕후는 생전에 만나지 못했다. 중종은 57세 때인 1544년에, 단경왕후는 71세 때인 1557년에 각각 세상을 떠났다. 이후 붉은색 치마를 펼쳐놓았던 인왕산 병풍바위는 ‘치마바위’라고 불리게 되었다.
백운동천_ 각석
*인왕산의 숨겨진 명소, 백운동천
‘백운동천’은 인왕산 자락의 숨겨진 명소 가운데 하나다. 청계천의 발원지인 ‘백운동천’ 일대는 오랜 옛날부터 경승지로 유명했던 곳이다. 조선 초기의 문신인 성현은 한양도성의 ‘5대 경승지’ 가운데 하나로 ‘백운동천’을 꼽았다. “삼청동이 으뜸이고, 인왕산이 다음이며, 쌍계동, 백운동, 청학동이 그 뒤를 따른다”라는 내용이 그 근거다. 그런가하면 겸재 정선의 작품집인 ‘장동팔경첩’에도 백운동이 등장한다.
‘백운동천’의 ‘동천’은 도교에서 “신선이 사는 곳”을 의미한다. 따라서 ‘동천’이라는 이름이 붙은 곳은 “신선이 살 정도로 아름다운 곳” 또는 “소통의 공간”을 상징하기도 한다. ‘백운동천’이 있는 곳은 인왕산 자락의 울창한 숲속인데, 대한제국 외무대신을 지낸 동농 김가진이 살았던 곳이다. 동농 김가진은 일제가 제안했던 남작 지위를 뿌리치고, 중국 상해로 건너가서 독립운동을 했던 인물이다. 현재 ‘백운동천’의 큰 바위벽에는 동농 김가진이 1903년에 쓴 ‘백운동천’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인왕산은 한양도성의 사소문 가운데 하나인 창의문(자하문)을 기준으로 북악산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이 창의문 천장에는 용이나 호랑이 대신 봉황이 그려져 있다. 이는 인왕산 끝자락이 ‘지네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네의 천적인 닭 대신 비슷한 형태의 봉황을 그려 넣은 것이다. 지네가 가진 나쁜 기운이 창의문을 통해 한양도성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한 것이다.
▲찾아가는 길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1번 출구⟶사직근린공원→인왕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