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당나귀를 만나보셨나요
- 백석 시 풍으로
경복궁 지나
금천시장을 건너오면
흰 당나귀를 만날 거에요, 당신은
꽃피지 않은 바깥세상일랑 잠시 접어두고
몽글몽글 피아나는 벗꽃을 바라보아요
뜨거운 국수를 먹는 동안
흰 꽃들은 눈송이가
창문을 두드려요
펄떡이던 심장이 잔잔해졌다고요?
흰 당나귀를 보내드릴게요
혹한의 겨울을 무사히 지낸
푸릇푸릇했던 당신의 옛이야기를
타박타박 싣고 올 거예요
흰당나귀가 길을 잃었다고요?
바람의 말과
수성동 계곡의 물소리를 따라오세요
불빛에 흔들리는 마가리가 보일 겁니다
우리 잠시, 흰당나귀가
아주까리기름 쪼는 소리로
느릿느릿 읽어주는 시를 들어보자구요
-「흰 당나귀를 만나보셨나요-백석 시 풍으로」전문
시인의 삶의 근거이기도 한 "사람향기가 살아나는 방, 서촌" (「사람향기를 맡고 싶소- M에게」)에는 "북두칠성을 함께 바라보고/꿈을 꿀 수 있는"(누하동 260-은희에게) 시간과 공간과 이야기가 있다.
그곳에서 만날 수 있는 '흰 당나귀'는, 물을 것도 없이, 어느 가난한 사내가 아름다운 나타샤와 함께 마가리에 갈 것을 상상했던, 바로 그 감정의 동료일 것이다. '흰당나귀'를 만나 몽글몽글 피어나는 벗꽃을 바라보다 잠깐 사이에 흰 꽃들은 떠나고 밀려드는 눈송이만 창문을 두드릴때, 그 옛적 청년 백석이 노래했을 '국수'의 맛도 전해오고 "아주가리기름 쪼는 소리"도 들려올 것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겨울을 지나 '흰 당나귀'는 청년 백석의 이야기를 싣고 이곳 "바람의 말과/수성동 계곡의 물소리"를 따라 "느릿느릿 읽어주는 시"처럼 당도할 것이다. 이처럼 박미산은 많은 선배 문인들을 따라왔다가, 백석에 이르러 자신의 글쓰기 충동과 그 의미로 귀환하는 계기를 완성한다.
그리고 몽글몽글, 푸릇푸릇, 타박타박, 느릿느릿, 그녀의 시쓰기는 차근한 행로를 이어갈 것이다. 옛적을 기억하고 현재형을 넘어 미래형으로 성큼 나아갈 것이다. 시집 끝에 실린, 새로운 귀환이자 출발을 암시하는 시편은 그러한 가능성을 깊이 암시해준다.
박미산 시인은 2006년 『유심』 시 전문지로 등단한 후, 2008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으로 재등단했으며, 고려대 국어국문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시집으로는 『루낭의 지도』,(2008년, 아르코창작기금 수혜) 『태양의 혀』,(2014, 세종도서 문학나눔 선정) 『흰 당나귀를 만나보셨나요』,(2020, 인천문화재단기금 수혜)가 있다2014년 조지훈창작지원상 수상, 2022년 손곡문학상을 수상했다.